사료의 교차검증이 어려운 상황에서, 대립하는 양 진영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에 끊임없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그 진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뭐 자연과학의 이론이라고 별로 다르진 않아서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는 경우 (가령 진화론의 등장 과정이라거나 1960년대 고인류학자들의 이론이 분자시계라는 새로운 개념의 등장에 의해 침몰하는 과정들 말이다.) 기존 학설이 폐기되고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 그 정도로 굵직한 사건들이 널려있지는 않다는 점이지만.....)
따라서 주장을 제시함에 있어 그에 상응하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학문적 당위다. 그렇기에 부족한 논거를 논파하여 그 주장의 설득력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 있어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긴 한데 논거가 부족하니 그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가능할 지 몰라도 그게 반드시 반대 주장까지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반대 주장을 하고 싶다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논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번 논의만으로 한정하자면 소비에트의 아카이브에서 해당논제를 입증할 논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까지는 합의된 정설이 될 지언정 소비에트의 아카이브에도 없다...라고 볼 근거는 없다. 즉 소비에트의 아카이브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금번 논쟁의 논거 아카이브는 소비에트가 아니라 중국이고..)
역사적 사실의 입증에는 항상 교차검증이 필요하고 그 교차검증 속에서 학설이 만들어진다. 자연과학적 실험 및 연구도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정 조건하에서 실험된 결과가 기존 이론과 이런 저런 관계가 있으니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양방향적 논의를 통해 합의되는 것이지 모든 조건에서 항상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 논전에서 상식이란 단어가 무의미한 이유는 상식이란 것이 학계 최일선의 논전을 통해 결국 이러저러한 논거가 있으니 이 정도까지는 진실이라 볼 수 있다는 합의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순면대제의 블로그에도 올라왔던 경제학의 향연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수는 대개 다른 교수들을 위해 글을 쓴다. 만일 우연한 기회에 대중 일반을 대상으로 글을 쓰게 되기라도 한다면, 누구나 알기 쉽게 간명하게 쓸 수 있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항상 동료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그러다 보니 듣기에는 좋지만 그 자신과 동료들이 틀린 것으로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만다. 교수들의 말은 아무리 간단한 말에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책 기획가는 오로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글은 교수들과 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교수들이 불확실해 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명확한 처방을 제시하며, 또한 교수들이 쉬운 답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쉬운 답변을 제시한다.(물론 우마왕은 이것이 쉬운 게 아니라 쉬워보이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경제학의 향연" 폴 크루그먼 저, 김이수, 오승훈 역, 부키, 1997, pp.26-27
그리고 결국 아래와 같은 카운터를 맞았다.
히요코 이래 참 오랫만에 보는 논전 상대방이 두들긴 전반적인 카운터인데 맞은 본인이 카운터를 맞은 건지도 깨닫지 못하면 어쩔 수 없겠다지만 분명한 것은 학설이건 이론이건 결국 전제조건에 기반한 state function이라는 게다. "학부를 졸업하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거 같고, 석사학위를 받을 때 쯤이면 자신이 아는 게 없음을 깨닫게 되고 박사를 받으면 자신이 아는 게 하나라도 있음에 기뻐하게 된다"는 우스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가 지금 어떠한 방법론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는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디씨적 시대에 뭔 헛소린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