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한 우마왕의 의견은 - 이 역시 트랙백 피드가 정석이겠지만 이전 포스팅에서 할로스캔 트랙백이 잘 안 먹어서 고생하던 경험을 살려 - 답글로 정리가 가능할 듯도 하여 할로스캔에 답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글자수 제한이 있었는지 답글의 절반을 먹어버리더군요. 약간의 허탈감과 당황함으로 기억을 살려 남은 절반을 몰아쳤더니 또 일부를 먹습니다? 결국 같은 글을 두번씩 남기고 3번의 답글을 써야 했지요. 기술적 한계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 블로그 주인장에겐 전문이 보이고 작성자에겐 안 보이는 시스템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아 좀 난감해질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답글을 모두 날려달라고 부탁드렸고 양대인께서 이를 받아들여 삭제한 상태입니다.
아무튼 삭제는 되었으니 다시 포스팅을 해야 겠고 우마왕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양대인께선 "먼저 제가 쓴 댓글의 경우는 현재 시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냉전 전 기간의 경쟁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셨는데 뭐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역사왜곡이라는 표현이 조금 과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역시왜곡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소비에트 전차포가 서방 전차포를 넘어선 적이 없다"라는 주장은 "현 시점에서는 소비에트 전차포가 서방 전차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라는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A. 1974년에 Dupuy 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는 평가의 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전- 이후 상황을 돌이켜보면 대략 3가지 정도의 고려가 가능한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1973년 영국에서 105mm L7 전차포를 위한 새로운 APDS-T 포탄인 L52A3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L28과 관통력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1500미터를 넘기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던 L28과 달리 L52A3은 제대로 2km 거리의 목표를 맞출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울러 T62 초기 생산형에선 조준체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탄착 조절이 쉽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봅니다.
2-B. 지난 포스팅에서 "참고로 APFSDS가 HEAT나 HESH보다 관통력이 올라간 것도 이 시기(Rh120의 등장) 이후입니다"라는 언급을 중요하지 않게 보신 듯 한데 이 또한 상대적으로 주요한 변수였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Rh120 등장 이전의) 전차포는 관통력과 유효사정거리 양면에서 HEAT가 AP보다 나았습니다. 당시 진영을 막론하고 AP탄들의 관통력이 200~300mm 정도였던 데 비해 HEAT는 400~450mm 정도의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력은 피아거리와 무관하게 이론적으로는 동일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MBT70을 만들 당시 미국이 주포의 포탄을 HE와 HEAT ATGM만으로 한정했던 이유였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먼로/노이만 효과와 메탈제트를 사용하여 관통력을 얻는 HEAT의 특성상 입사각 또는 이격거리에 문제가 생기면 그 효과가 확연히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었지요. 제3~4차 중동전 당시 몇발의 HEAT를 맞고도 멀쩡히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적 전차에 놀랐다는 이색렬 전차병들의 회고, 혹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국의 HESH 만세주의는 이 문제에서 출발한 듯 합니다. 파괴력은 떨어질지언정 확실하게 목표에 붙어서 터지니까요.) 어쨌거나 HEAT탄의 이러한 문제는 AP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했고, 그 결과 2km 밖의 목표에는 HEAT를, 2km 안쪽의, 다시 말해 확실하게 배제해야 하는 장갑목표에 대해서는 AP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습니다.
2-C. 다시 말해 Dupuy 장군이 T62와 M60이 fair match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HEAT 교전 능력은 비슷한데 떨어지는 AP 능력도 신형탄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고, T62의 화기관제 능력이 M60 보단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D. 그렇기는 한데 T-55나 T-62는 사실 제한적이지만 대 HEAT 장갑이 채용되었습니다. 유리섬유와 FRP를 이용한 간이식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에 반해 M60 시리즈는 블레이저 아머 이전엔 대 HEAT 대책이 거의 없었지요.
3.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1970년대에 이르면 소비에트 전차전력의 중심이 T62를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소비에트는 1969년부터 T64, 1975년부터 T72, 1976년부터 T80을 줄줄이 배치했습니다. 비록 영국이 1967년부터 120mm 전차포를 가진 치프틴을 생산하여 일선에 배치했습니다만 우선 숫자가 적은데다 HEAT와 특히 HESH를 선호하는 - 아마도 쓸만한 AP탄을 만들지 못해서로 추정되는 - 영국 전차부대의 전통 때문에 분리장약식으로 전차포를 만들어 발사속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엉망이던 명중률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커졌습니다.) 비록 이 시기의 소비에트 전차들이 진정한 3세대 전차로 보기엔 완성도가 떨어진데다 역시나 자동장전장치의 채용으로 발사속도에선 좋은 편이 아닙니다만 복합장갑을 채용하여 방어력을 개선한데다 숫적 우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전투력에 있어선 충분히 압도적이라 할 만 했습니다.
4. 레오2와 M1으로 전차전력의 주력을 교체한 이후인 1980년대 후반에도 NATO는 전술핵과 공격 헬리콥터를 조합한 방어대책을 거론했었지요. 다시 말해 "우마왕님께서는 나토의 방어전술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요인으로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를 꼽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양대인의 말씀은 우마왕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마왕은 어차피 당시 서유럽 지상군의 전차 전력은 WW2 당시의 독일처럼 확실한 질적 우위를 점한 것이 아닌, 오차범위에서의 동등,혹은 열세였다고 판정하며, 때문에 전차의 성능 우열은 당대 전력 구조상 큰 의미가 없었다고 봅니다. 제2세대 전차, 즉 MBT의 가장 주요한 개발 개념이 성능적 우열이 아닌 핵전하에서의 생존 및 전투력 유지였다는 점에서 말이죠.
5. 우마왕의 의견이 어디까지나 당시 가용하던 전차포탄들의 데이터와 당대에 개발된, 혹은 개발중이던 전차의 ROC등을 비교해서 내린 정황증거에 기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애초의 논제는 서방 전차포는 항상 소비에트보다 우위에 있었는가의 여부, 최소한 당대에 있어선 사실이 아니다."였지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짓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시점에서의 획득여부가 꽤나 의문스러우니 말입니다.